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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칼럼 - 청소년의 정신건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11.01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784
내용

                              청소년의 정신건강? 


가을이 되면서 나뭇잎들이 서서히 자신의 전부를 바꾸면서 제 몫을 다했다는 듯 거리의 낙엽으로 떨어지고, 낙엽은 사람들의 오감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드러낸다.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화하는 나무를 보면 항상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 밑동에서 살아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정도에 해당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이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無爲)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한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나무는 죽는다. 무의는 존재의 뼈대이다. 하나의 핵심부를 중심으로 여려 겹의 동심원을 이루는 세대들의 역할 분담과 전승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나이테를 들여다보는 일의 기쁨이다.  - 자전거 여행 2  작가 김훈


한 개체의 태어남과 성장 그리고 죽음 역시 이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개통발생 역시 반복한다는 생각을 한다. 신의 섭리인지 사람은 어려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오직 발전의 가능성만을 갖고 태어난다. 이후 수없이 많은 사랑과 접촉, 발의 꼼지락거림, 뒤집힘, 혀의 움직임 등등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자신만의 운동 능력, 언어적 능력, 정서적 능력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간다. 어찌 보면 이런 겉으로 보여지는 변화는 나무의 살아있는 10분의 1에 해당되는 바깥쪽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이 부분에 노출되어 있고 집중하기 쉽다. 그 사람의 영어 구사력, 그 사람의 외모, 간지나는 옷차림, 스펙 그리고 부모는 어떠한지 등등


그런데 나무가 바로 서게 만들어주는 부분은 그 안에 10분의 9, 바로 무위의 자리이다.

이번에는 보여지지 않고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청소년의 정신건강에 대해서 왜 소아정신과 의사가 이야기를 해야 할까? 부터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 과연 언제부터 건강은 의사의 몫이 되고 교육은 교사의 몫이 되었나?


내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은 어찌 보면 정신과 의사로서가 아니라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자격을 갖는 것이다.  즉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나는 내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에 대해 갖는 애정과 관심을 통해 지금도 사람의 성장과 발달에 대해서 재미있게 배워가고 있다. 또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숙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부모로서 공부하고 있다. 아동의 인지적 발달 및 정서적 발달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나의 부모로서의 미숙함, 한 사람의 부인으로서의 미숙함, 더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 미숙함을 알아보고 싶어서 정신분석을 받았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다. 한낱 공부를 했다는 이유가 사람을 모두 이해했다는 것으로 간주되서는 안된다. 나는 다만 내가 공부하고, 내가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에 접속하면서 체험한 것을 하나의 생각으로 펼쳐본다.


나의 짧은 생각에서 지금의 핵가족 제도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물론 아이가 세상의 중심 무대로 옮겨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는 그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문제는 지금은 자녀의 양육이 온전히 부모의 몫이고 책임으로 전환되었다. 자녀 양육이 어느 소수 개인의 희생과 사랑으로 이뤄진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어 본다. 그 개인이 많이 성숙해서 자녀 양육에 대해서 많은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우리는 그런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즉 많은 미성숙한 부모가 온전히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의 과거를 반복하게 된다. 그게 바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다시 돌아가서 사람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일까? 현재의 생명력 있는 나를 버텨주는 그 무위의 공간에 대한 질문은 지금도 진행된다. 현재까지의 답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뤄지는 소중한 만남이다. 부모를 포함한 가족, 교사, 애인, 친구, 책을 통해서 만난 인생의 선생들과의 의미 있는 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의 시기라면 부모를 비롯한 자신을 둘러싼 어른들과 친구들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태도, 마음 그리고 시간일 것이다. 그것에는 성숙한 사랑과 헌신이 깃든  시간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즉 인간이기에 보여줄 수 밖에 없는 미숙한 시간들도 있다. 단순히 보여지는 것만으로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구별할 수 없는 그런 시간들은 차곡 차곡 사람의 중심부로 가서 자리잡게 된다. 어찌보면 내부의 어른들이 아이들을 곧게 설 수 있게 버텨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의 공부는 어른들의 말과 행실을 보고 배우는 것이라고 했나보다.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요?라는 질문에 나를 보면 나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한다. 굳이 더 많은 예를 들지 않아도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둘러싼 많은 어른들의 몫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경험한 청소년의 문제는 공허함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타인이라는 불완전한 거울로만 자신을 확인한다. 그 거울이 수시로 바뀜에도 불구하고 그 거울에 의존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건들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청소년들을 건들기만 해도 마치 텅빈 동굴 속에서 무엇인가 작은 것이 떨어져도 수십 번의 울림으로 나중에는 공포스러운 메아리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떨림이 전해진다. 나무를 두드리면 내부의 꽉참이 전해지듯 누군가에게 어떤 힘든 사건이 벌어져도 그런 든든함으로 해결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어려서는 부모와 양육자들의 사랑과 관심, 접촉의 시간들로 채워져야 하고, 청소년기에는 삶에 대한 의문과 앎에 대한 집중 즉 다양한 사랑(philos)으로 그 속을 채워야 하는데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위 학습에 매달려 있다. 이는 공부가 아닌 주입이라고 칭하는 것이 맞겠다. 어려서는 TV와 스마트폰, 컴퓨터 혹은 각종 교재들이 부모와의 상호작용의 시간을 대체하면서 끈끈하게 들어가야 할 중심부는 공허하게 된다. 유치원, 초등학교를 가면서 주입은 점입가경이다. 아이는 자산의 의견을 말하거나 주도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도화지일 따름인가보다. 그냥 앉아있으면 프로그램 입력하듯 학교와 방과후 교실 그리고 학원에서 성적의 수치를 올려주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을 하나에서 열까지 입력시킨다. 거기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결정은 그저 자리와 시간을 내어 주기만 하는 것이다. 주는 밥만 먹으면 되고, 운이 좋으면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받아낼 수 있다. 순응이 주는 달콤함은 여기에서만 멈추지는 않는다. 간혹 다른 결정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저 싫다는 것인데 그러면 요즘은 이상하게 병원에 데리고 온다. 


초등학교까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면 학업과 학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아가는 즐거움이 뭔지 등에 대한 질문은 쓰레기통을 뒤져도 찾기 어렵다. 그냥 모두 공부만 한다. 정확히 말하면 왜는 없고 그냥 공부는 해야 한다고 입력되어 있다. 아주 짧게 주어지는 시간들에는 항상 옆에 있는 스마트 폰으로 향하고, 시험이 끝나 선물처럼 주어지는 시간들은 pc방을 갈 수 있다.


어느 철학가가 고등학교에 가서 물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philos) 것이 뭐니? 그 많은 학생들 중 단 한명도 자신의 사랑을 내비칠 수 없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조차 모르고 산다. 그냥 표준화되어 있다는 말이 맞는 듯 하다.


공부를 잘한다고 인생이 편한가?  명문대를 들어 갔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까지 일까? 의사가 되었다고 그 사람 인생이 행복한가? 사람은 어떨 때 행복한가?  마라톤처럼 결승점을 향해 꾸준히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면 결승점을 뛰어가는 그 사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때의 고통과 불행은 결승점에서의 행복을 위해서 감내해라? 살아보니 어른들이 하는 말 중 틀린 것도 있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 그냥 저 끝에 결승점을 임의로 설정해놓고 뛰라고 강요하고 순위를 매기는 부조리한 세상일 따름이다. 즉 청소년들은 꼭 어른들이 정해놓은 결승점을 향해 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림을 못 그려도 행복할 수 있고 내가 노래를 못해도 행복할 수 있듯 공부를 못해도 행복할 자격은 충분히 갖춘 것이다. 다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느냐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했느냐 그래도 찾지 못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찾았는데 문제가 생겼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한 것은 토플 점수나 수학 점수가 아니라 바로 내부의 단단함 그 자체이다. 그래야 하늘을 향해 곧게 설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교육학자는 자식을 잘 키웠다는 판단을 단 한마디로 일축한다. 당신의 자녀가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 있다면 그럼 자식 잘 키운 것이다. 그럼 지금 어떻게 할까요?라는 난감해하는 부모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학원을 줄이고 스스로 뭔가를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게 해라. 


숲의 나무가 하늘을 향해 서지 못하고 하나 둘씩 넘어져간다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나? 그냥 살아 숨 쉰다고 하는 그 바깥 10분의 1 부분에 응급 처치만 해주면 나무가 곧바로 설 수 있을까? 교육을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 안된다. 바로 그 나무들이 쓰러져 갈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응급처치와 더불어 속을 채워 넣어줘야 하고 안되면 외부에서 지지대를 설치해줘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가 스스로 다시 속을 채울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온갖 보도매체들은 연일 사건 사고를 보도한다. 세상이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것인가? 그래서 꼭 정신과 의사가 끼어 들어가야 해결되는 세상인가? �?� 가보라. 건강한 나무가 천지다.

어떻게 물한번 주지 않았는 대도 스스로 이겨내어 살 길을 찾은 나무들이 부지기수이다.

내가 물을 주지 않아도 자연의 섭리로 그들은 잘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나무를 살린 것은 어쩌면 온실 속에 가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살아가는데 힘들어서,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았어도 유치원, 학교, 친구들, 교사들 혹은 독서를 포함한 온갖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살길을 찾아 내부를 채운 친구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래서 지금도 세상은 잘 굴러가지 않는가? 문제는 스스로 보상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어른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너무 어려서부터 해결하기 어려운 공허함과 울림으로 자라난다면 그들은 자연의 섭리만으로는 제대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변화하고 자란다. 곧게 자라지 못할 따름이지 나무로서 한 몫은 한다는 말이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달라지고 변화하길 바란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은 부모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교사, 어른들이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변화하고 성숙하면 된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다.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래서 어려서의 공부는 어른들의 말과 행실을 보고 배우는 것이라고 했나보다. 어른들이 공부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데,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우라는 말인가? 내가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면 적어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는 말자.


 

 

- 상기 글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발행하는 월간 교육전문지 "교육신문"에서 2012년 11월호(391호) 청소년 정신건강에 관한 전문가 제언으을 주제로 청탁받은 원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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